#천사의부름 #기욤뮈소 #프랑스소설 #사랑 # 스릴러소설
조나단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휴대폰 버튼을 살짝 눌렀다. 전원이 켜지며 휴대폰이 말갛고 환한 빛을 발산했다. 빨간 막대 모양의 아이콘에 불이 들어왔다.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표시였다. 다시 호기심의 포로가 된 그는 본능적으로 아이콘을 누르고 메일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메일은 놀랍게도 그의 앞으로 온 것이었다.
조나단(랑프뢰르 씨 같은 호칭은 아예 생략할게요. 당신이 지금 메일을 읽는 중이라면 내 휴대폰에 넣어둔 사진 앨범도 다 봤으리라 생각해요. ‘예술’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으니 눈요기도 실컷 했겠군요. 제 사진을 정말 봤다면 한 마디로 당신은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뭐, 당신이 변태든 아니든 나와는 상관없지만 그 사진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짓 따위는 하지 말길 바랄게요. 저와 결혼할 사람이 보면 기분이 몹시 상할 테니까.)
- 책 내용 중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천둥이 치고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거렸지만 프란체스카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매들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액정화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그녀의 손가락이 아이콘 하나를 터치하자《베니티페어》지의 인터넷기사가 나타났다. 몇 년 전《베니티페어》지에서 「요리,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조나단 부부에게 장장 여섯 페이지를 할애해 실은 기사였다.
요리에 관한 인터뷰 내용과 큰 연관이 없는 섹시한 포즈로 찍은 그들 부부의 사진이 다수 실려 있었다. 부부가 똑같은 문신을 한 견갑골을 드러내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매들린은 문신의 문구를 확대시켜 보았다.
You'll never walk alone.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어.
지금은 갈라선 부부의 사진이 갑자기 처량해보였다.
“매들린, 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
라파엘이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녀를 불렀다.
- 책 내용 중
밝은 색상의 면 소재 옷을 입은 전직 모델 프란체스카가 반짝이는 터키옥색 바닷물이 찰싹이는 백사장을 조르주라는 남자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은 콜로니얼 양식의 한 카페테라스에서 두 연인이 달콤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1990년대 캘빈클라인 광고처럼 섹시하면서도 빈티지한 느낌이 묻어나는 사진들이었다.
주로 남성 대중스타들의 폭로기사를 실어온 이 잡지가 작정이라도 한 듯 ‘프란체스카의 불륜’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녀의 외도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요즘 세상에 어울리는 비극적 요소를 모두 갖춘 완벽한 기삿거리였다.
첫째, 남편의 절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 휴양지로 밀월여행을 떠난 매혹적인 여자.
둘째, 뉴욕에 남아 아들을 돌보며 파산 직전의 레스토랑을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남편.
셋째, 앞의 두 주인공 못지않은 비중을 가진 여자의 정부.
- 책 내용 중
매들린 경감은 어쩌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을까? 죄책감? 업무 과다? 끔찍했던 수사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한 탓일까? 현재로서는 마지막 이유가 가장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헨리 폴스터 맨체스터 경찰청장은 앨리스 딕슨의 사망사실을 접한 매들린 경감이 휴가를 내고 쉬던 중이었다고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앨리스 딕슨(14세)은 며칠 전 머지사이드 경찰에 체포된 악명 높은 시리얼킬러 해럴드 비숍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매들린 경감의 자살 기도 소식을 접한 동료들은 충격과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매들린과 함께 앨리스 딕슨 사건을 담당했던 동료 짐 플러허티 경위는 ‘리버풀의 푸주한 놈이 철창 안에서까지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만들 뻔했어요.’라며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 책 내용 중
예감이 나빠. 아이가 가출했다면 돈을 두고 갔을 리 없잖아.
매들린은 머릿속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그녀가 긴급 요청한 과학수사팀이 막 현장에 도착했다. 과학수사요원들은 핀셋과 메스, 끌을 이용해 샘플을 채취한 다음 꼼꼼하게 밀폐용기에 담았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이 증거가 될 만한 물품들을 차로 실어 나르는 동안 매들린은 앨리스가 학교에 제출했다 돌려받은 과제물을 모아 정리해둔 파일들을 펼쳤다. 과제물마다 높은 점수를 받았고, 교사들의 평가도 칭찬 일색이었다.
앨리스는 끔찍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공부라는 안식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공부와 지식을 방패삼아 폭력과 공포, 좌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 책 내용 중
아무리 사명감이 투철한 경찰이라도 간혹 버티기 힘든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허망한 사망 사고, 심각한 가정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들, 아동학대,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을 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심각한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는 경찰들이 허다하다.
매들린의 동료들 중에도 우울한 생각에 빠져 지내다가 제어불능이 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작년에는 매들린의 동료 형사가 용의자를 검문하던 중 별안간 머리가 돌아 합당한 명분 없이 깡패 보스 를 쏘아 죽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육개월 전에는 연수를 받던 여경이 직무용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매들린은 다행스럽게도 경찰이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지도, 우울증에 빠져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치탬브리지에 자청해서 남은 사람이었다. 고참이든 신참이든 이 험한 동네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수록 그녀에게는 더욱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녀는 치탬브리지 경찰서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확보했고, 그 결과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들을 도맡아 어느 정도 자율권이 주어진 속에서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 책 내용 중
매들린은 밤마다 앨리스에 대한 꿈을 꾸었다. 아이의 시선은 밤새도록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단서가 발견되거나 지금껏 생각해내지 못한 획기적 수사방향을 찾아내길 기대하며 잠에서 깨곤 했다.
동료형사들이나 상사들은 항상 매들린을 심지가 굳고 강단 있는 경찰로 평가했다. 그런 그녀도 이번에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건 희생자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녀는 감정이입을 통해 희생자에게서 느끼는 절절한 연민을 수사에 적극 활용했다. 희생자의 고통을 철저하게 내면화하는 순간 그녀의 수사는 어느 때보다 높은 효율성을 보였다. 수사용어로 ‘근접성 효과’라고 했다. 위험천만한 방법이지만 수사에는 매우 효과적인 게 분명했다.
매들린은 앨리스 실종사건을 수사하면서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실종신고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는 감정을 제대로 추스를 수가 없었다. 앨리스는 어린 시절 자신의 처지와 꼭 닮은 아이였다. 피해자와의 동일시, 본능적인 이끌림, 무의식적인 애착이 자신을 얼마나 괴롭힐지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개인사적인 관심을 뛰어넘어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이제 아이 엄마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실종의 책임이 있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 책 내용 중
6월 15일, 치탬브리지경찰서로 의문의 소포 한 상자가 배달됐다. 수신인은 앨리스 딕슨 사건 담당 형사인 매들린 그린 경감으로 되어 있었다. 피크닉용 아이스박스와 유사한 플라스틱 밀폐용기였다.
매들린이 뚜껑을 열자 잘게 부순 얼음조각들이 나타났다. 얼음조각을 헤치면서 아래쪽으로 파내려가자 점점 붉은색이 드러났다.
매들린은 얼음조각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액체가 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동작을 멈춘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 다음 다시 얼음조각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밑바닥에 반쯤 해동된 핏덩어리를 보는 순간 그녀는 구토를 참기 힘들었다. 사람의 몸에서 떼어낸 장기였다. 메스를 이용해 거칠게 떼어낸 심장.
사람의 심장.
앨리스의 심장.
- 책 내용 중
지금껏 나는 앞만 보고 질주했다.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들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나는 전투적이었고, 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기회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만만치 않은 적을 만났다. 바로 나 자신. 최후의 적. 가장 위험한 적.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건 아니다. 며칠 전부터 나를 갉아먹고, 나를 허무의 늪으로 밀어 넣는 이 돌연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해결책일 찾아낸 것뿐이었다.
우정? 내 주변에는 한 번도 친구가 없었다. 가족? 이제 내게는 가족이 없다. 사랑? 이제 사랑은 떠났다.
찰리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가슴이 아파 거기에 매달려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이를 향한 사랑도 내 죽음에 대한 갈망을 떨쳐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리볼버 총신을 관자놀이에 대고 차가운 금속성 감촉을 느꼈다. 총알을 장전한 나는 태양을 한 번 더 바라본 다음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하고 비로소 해방된 기분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 책 내용 중
“비숍은 본인이 살해하지 않은 경우에도 자기가 범인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지 않던가요?”
“그건 맞아요. 비숍 같은 시리얼킬러들 중에는 그런 주장을 펴는 놈들이 간혹 있어요. 그렇지만 비숍의 범행 일체를 다 밝혀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오. 그 놈이 주절주절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수사상 요긴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놈이니까. 놈은 아주 계산적인 사이코패스라 할 수 있지. 심문을 받을 때 보니 수사관들을 데리고 놀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놈이었소. 범행을 자백했다가 곧 다시 번복하고, 갑자기 다른 범행 사실을 털어놓아 수사에 혼선을 빚게 하는 놈이지. 비숍의 집 마당에서 발견된 유해를 모두 수거해 DNA분석을 해봤지만 앨리스의 유전자 프로파일은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사실이 비숍이 앨리스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지 않소?”
조나?은 튀긴 생선을 뜯어 먹다 구역질을 느꼈다. 마치 한증탕에 들어온 것처럼 후덥지근해 앉아 있기가 영 거북했다.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페리에(프랑스산 탄산수 브랜드 : 옮긴이)를 시켰다.
“지금도 매들린을 사랑합니까?”
조나단이 탄산수 뚜껑을 따며 불쑥 물었다.
짐이 갑자기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솔직히 인정하세요. 얼굴 예쁘지, 똑똑하지, 배짱 좋지. 매들린 정도면 정말 매력적이라 할 수 있잖습니까?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죠. 안 그런가요?”
그 순간 짐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 책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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