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아파트 #기욤뮈소 #장편소설 #프랑스소설 # 스릴러소설
이제 겨우 지난 아픔을 묻어버리고,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넌 백화점에 갔다가 그 남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다시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겪게 된 거야.
이미 극복했다고 믿었는데 그 남자와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왜 그리 마음이 혼란스러웠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안고 있는 아이 때문이었을 거야. 그 남자와 결별하지 않았더라면 혹시 네가 바로 그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 남자도 너를 발견하고 몹시 놀란 눈치였어. 그의 얼굴에도 너만큼이나 불편하고 복잡한 심기가 어려 있었지. 넌 그 남자가 무슨 말이든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마치 사냥꾼을 발견한 수사슴처럼 서둘러 발길을 돌려버렸어.
“조제프, 이제 그만 돌아가자.”
넌 그 남자가 아이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 남자와 함께 아이를 낳게 되면 ‘조제프’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약속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 p.11~12
가스파르는 새 희곡을 쓸 때마다 한 달씩 파리에 유폐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씁쓸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글쓰기.
그의 출판대리인이자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카렌은 매년 파리에 개인주택이나 아파트를 한 채 임대했다. 그는 파리를 너무나 싫어했기 때문에 카렌이 임대해놓은 집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글쓰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의 파리는 더욱 질색이어서 스물네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카렌의 작전은 늘 성공리에 끝났다. 1월 말이면 그는 어김없이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까.
--- p.18~19
매들린은 마치 빛에 끌리듯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화면을 구성하는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질감들이 다양한 뉘앙스를 풍기며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그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불과 몇 초 만에 화면이 백색에서 청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분홍으로 되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림이 분출하고 있는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실체가 뭔지는 분명하게 잡히지 않았다. 숀 로렌츠의 그림은 안정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하나의 그림이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매들린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두 다리가 뇌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이 쏟아내는 빛으로부터 몸을 피하고 싶지 않았고,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오가며 조금 더 오래도록 전율을 맛보고 싶었다.
--- p.74
“당신은 왜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지 않죠? 차라리 시민단체에 가입해 세상을 바꿔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나요?”
가스파르가 입을 삐죽거렸다.
“난 정당이나 노조, 시민단체 따위를 믿지 않습니다. 난 브라상스가 ‘네 사람 이상이 모이면 즉각 멍청이 집단이 된다.’라고 한 말에 깊이 동의하는 사람이니까요.”
“아마 당신에게 자식이 있었더라면 백 마디 말보다 당장 미래를 바꾸기 위한 투쟁에 뛰어들었겠죠. 여태껏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미래 말입니다.”
가스파르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아이가 있나요?”
“아직 없어요. 언젠가 갖게 되겠죠.”
“세상 여자들이 다 아이를 낳으니까 당신도 그러려고요? 엄마가 되어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라도 하게요?”
매들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는 아예 플라스틱 생수병을 던져버렸다.
“당신은 정말 역겨운 소리만 골라 하는군요!”
매들린이 계단을 올라가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가스파르는 긴 한숨을 쉬었다. 술 때문에 괜한 말을 지껄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빨리 후회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마시고 나서 라운지체어에 길게 누웠다.
가스파르는 술기운 때문에 몽롱해진 머리로 방금 전 언쟁을 돌이켜보았다. 거친 화법이 문제였지만 평소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충분히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부모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아이를 보호해줄 역량이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스파르는 그럴 자신이 없었기에 두려웠다.
--- p.89~90
“아니, 전혀 몰랐어요. 숀과 페넬로페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부였어요. 그들은 결혼생활을 유지해오는 동안 끊임없이 상대를 도발하고 상처를 내며 심각한 갈등을 빚었죠. 마치 싸우지 않고는 잠시도 부부 사이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 같았어요. 저는 그들이 부부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찾아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살펴봤지만 끝내 알아낼 수 없었어요. 둘 중 누가 헤게모니를 잡고 부부 사이를 이끌어 가는지에 대해서도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일반적으로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라도 아이가 있으면 공통적인 관심사가 생겨 갈등이 잦아든다던데 그렇지도 않았나요?”
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심각하게 금이 간 상태였기 때문이겠지만 줄리안이 두 사람 사이를 친밀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어요.”
--- p.108
“숀처럼 천재성이 번득이는 화가는 뭔가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드러내 보여주죠. 피에르 술라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칠하는 겁니다. 저는 숀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어떤 대상을 그릴 색을 떠올리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숀이 그 대상이 뭔지 털어놓지 않던가요?”
그는 어깨를 추어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네, 그러니까 더욱 감을 잡기 어려웠죠.”
“마침내 숀이 원하는 색을 찾아주었나요?”
“물론이죠. 석고에서 추출해낸 광물질을 토대로 뽑아낸 안료를 구해주었습니다. 그 안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딱 한 군데밖에 없죠.”
장 미셸 파이욜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딘데요?”
“화이트 샌즈. 이제 어딘지 감이 잡히십니까?”
매들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은빛 모래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막을 기억해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뉴멕시코 주의 사막 말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는데 비밀스러운 신무기와 신기술을 시험하는 곳이죠. 바로 그곳에 희귀한 석고를 만드는 광산이 있어요. 일종의 변질된 광물질인데 거기에서 분홍색이 살짝 가미된 회백색 안료를 추출할 수 있었습니다.”
--- p.142~143
임사체험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바로 전날 겪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전혀 흐릿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감각적인 기억은 한층 더 분명해지고, 어렴풋이 보았던 이미지들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는 영적 여행에서 맛보았던 마음의 평화, 찬란한 빛으로부터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숀 로렌츠의 그림에도 바로 그 빛의 부름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의 그림은 그 빛이 지닌 뉘앙스와 강렬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눈을 못 뜨게 만드는 찬란한 태양처럼,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도록 주변을 밝히는 빛이었다.
--- p.181
“말도 안 돼요. 페넬로페는 분명 줄리안과 인형을 구별할 수 있었을 거예요.”
“페넬로페는 납치 장소에서 상상하기 힘들 만큼 잔혹한 폭력을 당했습니다. 얼굴이 뭉개지고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지고, 코도 내려앉고, 가슴 부위에 여기저기 상처가 나게 되었죠. 게다가 엄마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상황인지라 피와 눈물이 눈 안으로 계속 흘러들었겠죠.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몇 시간째 가시철사의 뾰족한 침이 살갗을 파고드는 상태에서 얼마나 냉정한 사리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몸속의 피가 자꾸 빠져나가고, 몸이 묶여 있어 자기가 싸놓은 똥오줌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과연 사물을 제대로 구별하는 게 가능했을까요? 정말이지 페넬로페는 고약한 경험을 했습니다. 절단기로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야 하는 일도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빠져있었을 공산이 큽니다.”
--- p.247
살인마를 체포해 감방에 보내는 순간 느끼는 환희는 사실 아주 잠깐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암세포를 도려낸 자리에서 다시 종양이 자라듯 아무리 살인마를 체포해도 살인사건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매들린은 그럴 때마다 격렬한 사랑을 나눈 끝에 느끼는 허탈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매들린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찬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때? 넌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해. 너 혼자서는 미국의 프로파일러들을 탈진시킨 마왕 사건을 해결할 수 없어.
아니, 난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
매들린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일생일대의 사건을 해결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강력계 형사라면 누구나 맡고 싶어 하는 사건이었다. 마왕 같은 납치살인마가 존재하는 한 젖병과 기저귀 사이를 오가는 평화로운 삶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는 괴물이 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사냥의 환희를 맛보아야 할 시간.
--- p.312
[네이버,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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