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파크 #기욤뮈소 #프랑스소설 #스릴러소설

 

 

알리스 쉐페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막 떠오른 새벽햇살에 눈이 부셨고, 아침이슬을 맞은 옷은 축축했다. 오소소한 소름이 돋을 만큼 추운 날이었고, 이마에는 축축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갈 만큼 갈증이 났고, 입안에서는 타다 남은 재 맛이 느껴졌다. 관절마디가 안 아픈 곳 없이 쑤셔댔고, 사지는 뻣뻣하게 마비되었고, 머릿속은 몽롱했다.
몸을 반쯤 일으킨 알리스는 그제야 자신이 숲속의 통나무 벤치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장하고 다부진 남자의 몸이 옆구리 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알리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며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 남자의 몸을 떼어내려고 몸을 뒤채다가 중심을 잃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그녀는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순간 알리스는 자신의 오른손과 남자의 왼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의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리스는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10월 8일, 화요일, 8시였다.
-8~9p

 


뉴욕이 아침이면 프랑스는 이른 오후인 만큼 동료 형사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그녀에 대해 걱정을 크게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세이무르가 휴대폰으로 연신 통화를 시도했겠지? 
우선 세이무르에게 연락해 지난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게 하는 게 순서일 듯했다. 알리스는 머릿속으로 세이무르에게 지시할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1)프랭클린 루즈벨트 대로변의 지하주차장 CCTV 녹화 필름을 확보할 것.
2)지난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파리에서 뉴욕을 향해 출발한 항공편을 확인할 것. 
3)내가 타고 다니는 아우디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찾아낼 것. 
4)더블린 경찰서에 연락해 가브리엘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가 한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것.
-24p

 

 

나는 더 이상 의사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듯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명멸한다. 아침에 범죄현장에서 본 여교사의 사체가 떠오른다. 나일론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죽은 클라라 마튀랭은 두 눈이 뒤집어져 흰자위가 허옇게 드러나 있고, 얼굴에는 극심한 공포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권리가 없다. 흉악범이 다른 피해자를 또다시 양산해내기 전에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약용식물요법은 어떠세요? 약용식물을 잘 섭취하면 우리 몸에 아주 유용합니다. 혹시 방광염에 덩굴월귤이 좋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나는 갑자기 의사의 책상 뒤로 돌아가 아직 작성하지 않은 처방전 용지 한 장을 묶음에서 떼어낸다.
“박사님께서 아직 제가 얼마나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것 같군요. 계속 제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제가 직접 처방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폴 말로리 박사는 나의 갑작스런 도발에 깜짝 놀라며 미처 나를 제지시킬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나는 처방전을 들고 몸을 돌려 진료실을 빠져나오며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다. 
-70~71p

 

 

 


폴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우리 할머니가 아말피 해안에 집을 한 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던가요?”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산레모로 진입하고 있다. 태양은 마지막 남은 열기를 거의 다 소진해가는 중이다. 
폴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낀다. 나는 그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짧은 시간에 이토록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눈빛을 바라보는 게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없다. 
우리의 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지닌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아주는 당신의 반쪽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86~87p

 

 

지난 11개월 동안 파리16구와 17구에 사는 독신여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고 있는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경찰은 수백 명의 인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수사를 펼치고 있다. 
2010년 11월 12일에 살해된 여교사 클라라 마튀랭 양과 2011년 5월 10일에 살해된 항공사 스튜어디스 나탈리 루셀 양, 8월 18일에 사체로 발견된 간호사 모드 모렐 양 그리고 지난 일요일에 살해당한 은행원 비르지니 앙드레 씨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수사당국은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독신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해 피해자들의 인맥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설득력 있는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네 건의 살인사건이 범행수법이 일치하고,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저항 없이 문을 열어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는 점이 파리16구, 17구 지역주민들에게는 더욱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고 있다. 해당지역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경찰은 평소의 열 배가 넘는 인력을 배치해 순찰을 강화하는 한편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행동을 하는 자가 있을 경우 지체 없이 신고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110-111p

 


에릭 보간의 집은 텅 비어있는 듯 보인다. 전등도 켜지지 않고, 가구도 없고, 바닥에 빈 상자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나는 권총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휴대폰을 손에 든다. 세이무르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순간 등 뒤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몸을 돌리는 순간 오토바이 헬멧 속에 숨은 놈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다시 총을 빼들려는 순간 칼날이 먼저 내 살을 헤집고 들어온다. 
칼날이 내 뱃속에 든 아기를 난도질한다. 에릭 보간이 내 배를 연속적으로 찔러대는 바람에 나는 곧 두 다리의 힘이 풀리며 바닥에 고꾸라진다.
나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에릭 보간이 내 스타킹을 벗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분노와 증오,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가운데 내 정신이 서서히 내 몸을 벗어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득 아버지가 떠오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팔뚝에 문신으로 새겨 넣은 문장이 생각난다. 
악마가 부리는 술수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묘책은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127~128p

 

 


수술이 끝나고 나자 머저리 같은 의사가 나에게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내 뱃속에서 태아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내 신체기관들이 칼날의 치명적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내 아기가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몸부림을 치며 내 몸에 연결된 의료기기를 모두 떼어낸다. 의료진이 급히 신경안정제를 주사한다. 의료진은 내가 신경안정제를 맞고 잠잠해진 사이 상처를 봉합하고, 장기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단행한다. 
멍청한 담당 의사는 훗날 자궁을 보존하는데 성공했다는 말도 해준다. 마치 내가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만나 임신을 할 수 있기라도 하듯이…….
-180~181p

 


이물질이 쇄골에서 4, 5센티미터쯤 아래쪽 피부 안에 박혀 있었다. 알리스는 이물질을 꺼내기 위해 피부를 꾹 눌러보았다. 그러자 가로 세로가 각각 1,2센티미터 가량 되는 사각 물체의 둥그스름한 가장자리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맙소사! 도대체 누가 내 몸에 이런 걸 심어놨을까?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가운데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알리스는 본능적으로 옷을 벗고 가슴, 몸통, 겨드랑이 등을 두루 만지고 눌러보았다. 몸 어딘가에 최근에 수술한 흔적이 남아 있는지 살펴봤지만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언제부터 이물질을 몸에 삽입하고 다녔을까? 
누군가 내 몸에 이물질을 삽입해 얻고자 하는 효과는 뭘까? 
-206p

 

 

아버지가 에릭 보간의 시체를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고 한 바로 그 설탕공장에서 또 다른 희생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아무튼 에릭 보간은 단독범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리 두뇌가 뛰어난 자라고 하더라도 여러 나라를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리며 살인행각을 벌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느 모로 보나 어마어마한 비용과 치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한데, 에릭 보간 혼자 복잡한 퍼즐을 꿰어 맞춰간다는 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에릭 보간이 가브리엘과 나를 납치해 뉴욕에서 깨어나게 했을까? 만약 죽일 생각이었다면 손쉽게 해치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살려서 뉴욕의 센트럴공원에서 깨어나게 했을까? 언젠가는 분명 자기에게 큰 위협이 될 텐데 과연 그렇게 한 목적이 무엇일까? 
알리스는 점점 더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할 뿐 속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왜 나에게 에릭 보간을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236p

 


알리스의 두 눈이 문득 가브리엘의 위스키 잔에서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 한 자리에 고정된 채 꼼짝하지 않았다. 알리스의 시선은 잔에 담긴 불그레한 액체 속에서 흩어졌다. 그제야 알리스는 자신이 주시하고 있던 게 위스키가 아니라 술잔을 감싸 쥐고 있는 가브리엘의 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중에서도 규칙적으로 술잔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한 개의 손가락이었다. 마치 돋보기를 통해 사물을 볼 때처럼 그 손가락이 아주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알리스는 가브리엘의 손가락에 잡힌 주름, 그가 잔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그마하게 남는 오른손 검지의 십자가 형태 상처 자국을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가령 오피넬 칼을 난생 처음 소유하게 된 아이가 조심성 없이 칼을 접다가 생긴 상처를 봉합한 자국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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