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의소녀 #기욤뮈소 #장편소설 #프랑스소설 #스릴러소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말수가 적고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어. 당신의 우수 어린 눈빛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이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당신을 운명의 상대로 믿는 나를 만났으니 더 이상 쓸쓸해서는 안 되니까. 
“당신은 지금 우리 사이를 망치려 하고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난 이미 시행착오를 겪은 적이 있어. 서로 속마음을 모르면서 부부 사이가 된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내 말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주게 될지 알 수 있었지만 난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어. 내가 당신에게 운명을 걸기로 작정한 이상 내 머릿속에 자그마한 의구심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결혼해서 함께 살기로 한 이상 당신에게도 내 의구심을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지난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내가 그 짐을 나누어 갖고 싶었어. 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당신이 못이기는 척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을 거라 믿었지. 
--- p.12

 


“실종신고를 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 현재는 안나가 실종되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니까 경찰에 신고해 봐야 당장 수사에 착수하긴 어려울 거야. 안나가 현재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잖아?”
“저를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방금 말했다시피 당장은 나도 자네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어.”
“경찰에 남아 있는 지인들을 통해 안나의 휴대폰 위치 추적을 한다거나 통화 내역 확인, 신용카드사용 내역이나 현금인출 내역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르크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자네는 지금 억지 주장을 펴고 있어. 사랑하는 남녀가 말다툼을 해 연락이 두절될 때마다 경찰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경찰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아나?” 
내가 불끈 화가 치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마르크가 내 옷소매를 잡고 만류했다.
“자넨 다 좋은데 성질이 급한 게 문제야. 잠깐 기다려 봐. 자네가 내 도움을 바란다면 일단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을 단 한 가지도 빼놓지 말고 몽땅 털어놓아야 할 거야.”
“이미 다 말했는데 뭘 더 털어놓으라는 겁니까?”
마르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 이래봬도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범죄자들을 취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자네는 분명 가장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어.” 
--- p.41~42

 

 


마르크는 방향등을 켜고 옵세르바퇴르 대로를 돌아 분수 물과 함께 솟아올라 몸을 떨어대는 말떼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를 지났다. 마로니에 그늘에 차를 세운 그는 거칠게 차문을 닫고 인접한 공원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치 이탈리아에 온 듯 열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슐레 센터의 붉은 벽돌 기둥을 지나자 공원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문득 지나간 추억이 떠올랐다. 생 미셸 대로변에 살던 시절 딸아이와 함께 자주 드나들던 공원이었다.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절실히 깨달았다. 두 눈을 연신 깜박거려 보았지만 머릿속에서 당시 여섯 살이었던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끄럼을 타던 아이, 사크레쾨르에서 처음 회전목마를 타던 아이,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깡충거리며 뛰던 아이, 팔롬바지아 해변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다 지쳐 품에 안겨 잠들었던 아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하늘에 떠올라 있는 연을 가리켰던 아이.
남자는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추억 말고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 p.63~34

 

 

 


한 마디로 지극히 거칠고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장면이었다. 사륜구동 차가 굉음을 발하며 창고 문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문이 떨어져 나가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차에서 내려 박스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는 미처 1분도 되지 않아 안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안나를 구하러 온 백기사가 아니라는 건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동작으로 미루어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륜구동 차의 트렁크를 연 남자가 안나를 인정사정보지 않고 안으로 던져 넣었다. 잠시 후 차에 오른 남자는 이내 검정색 스프레이와 흰색 스프레이를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폰 동영상은 창고에서 나온 남자가 차의 시동을 걸고 바깥을 향해 출발하는 지점에서 모두 끝났다.
마르크는 휴대폰의 볼륨을 최대한 키우고 나서 다시 한 번 동영상을 재생했다. 문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사륜구동 차, 얼굴을 가린 남자의 포로가 된 안나…….
--- p.107~108

 

 

정부의 관련 부서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재현장 분석만으로도 꼬박 이틀이 소요되었다. 화재현장의 배관파이프와 하인츠 키퍼가 타고 다니던 픽업에서 소녀들의 머리카락과 두 개의 지문이 발견되었다. 열흘 간에 걸친 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 결과 하인츠 키퍼와 세 소녀의 지문은 아니었다. 두 개 중 하나의 지문은 끝내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고, 나머지 하나는 클레어 칼라일의 지문으로 밝혀졌다.
하인츠 키퍼가 클레어 칼라일을 납치 감금할 무렵 리부른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도르도뉴 지방 리베락에 사는 모친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화재현장을 중심으로 제법 넓은 지역에서 다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 주택의 연못 바닥을 준설하기 위해 굴착기들이 동원되었고, 숲을 수색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동원되었다. 경찰은 클레어 칼라일의 시체를 찾기 위해 자원봉사자들까지 동원해가며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쳤다. 
경찰의 수색 결과 끝내 클레어 칼라일의 사체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녀의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츠 키퍼가 집단자살을 시도하기 전 클레어 칼라일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하인츠 키퍼 사건 수사는 결국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경찰은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해 한동안 수사를 종결짓지 못하고 차일치일 시간만 흘려보냈다. 사건담당 검사는 2009년 말에 이르러서야 결국 클레어 칼라일의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고 공식적으로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그 후, 아무도 브루클린의 소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p.128~129

 


엘리즈는 단호하면서도 우수에 잠긴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에 수정 같은 두 눈이 매력적인 동부 출신 여자였다. 처음에는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무심해 보였지만 막상 친해지고 나자 더없이 따스하고 지적이고 열정적인 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엘리즈가 살아있을 당시 좀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회한과 끝내 살려내지 못한 자책감이 동시에 엄습해왔다. 
엘리즈 덕분에 처음으로 고전문학, 회화, 음악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소설이나 시집, 전시회 카탈로그 따위가 들려 있었다. 
마르크는 지갑에 들어 있는 렉소밀을 꺼내 반으로 자른 다음 혀 아래로 밀어 넣었다. 더 이상 우울한 세계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약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즉각 알약의 효과가 나타났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엘리즈의 이미지들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고, 혈압도 정상적으로 낮아졌다. 엘리즈가 즐겨 인용했던 플로베르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왕의 침실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침실을 봉해놓았을 뿐 완전히 부수지는 않았다. 
--- p.171

 

 

 

 

 

갑자기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소설을 쓰다 보면 간혹 등장인물이 작가를 기습하는 순간들이 있다. 작가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등장인물 스스로 이야기에 끼어드는 경우이다.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매우 좋은 글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의도하고 쓴 글이 아닌 만큼 당장 지워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야기 전개상황에서 매끄러운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문장이었다. 작가인 나에게는 간혹 발생하는 돌발 상황으로 그때마다 매우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작가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등장인물 스스로 이야기에 끼어든 셈이니 정말이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젤라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마치 내가 소설을 쓸 때 등장인물이 개입했던 경우처럼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경찰이 조이스의 최근 통화내역을 분석한 결과 마약 딜러 한 놈을 체포했어요. 경찰에 잡혀온 그놈은 주말이 끼어 있어 조이스에게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마약을 팔았다고 털어놓았죠.”
“혹시 조이스를 살해할 만한 동기가 있다고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까?”
글래디스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번져갔다.
“딱히 살해동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마약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누구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위험한 상황에 휩쓸리게 되겠죠.”
--- p.190~191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원직원에게 지난 몇 개월 동안 일부 약국창고에서 벌어진 의약품 도난사건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고 둘러대고 나서 정작 제가 궁금해 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여자아이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요. 처제에게도 극비라는 점을 주지시킨 다음 여자아이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처제가 말하길 전날 밤 야간 근무자와 간호사가 신고전화를 받고 세탁실 근처로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여자아이가 정신이 들어 스스로 사라진 거라 치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따금씩 걸려오는 장난전화였다고 결론 내리고 전혀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더군요. 당직 보고서에도 기록해두지 않았고, 병원책임자에게 구두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깊은 어둠 속에 잠긴 숲이 음험하고 불길한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성곽처럼 둘러쳐진 나무들이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 p.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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