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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고, 햇빛이 닿은 쪽마루 바닥에서 뿌연 먼지가 일었다. 내 머릿속은 1990년대 초로 되돌아갔다. 내 눈앞에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앉아 있는 빙카가 보였고,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 우리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빙카는 [연인]과 [위험한 관계]에 대해 열을 올려가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마틴 에덴]과 [벨 뒤 세뇨르Belle du Seigneur]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는 칸의 스타극장 또는 앙티브의 카지노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해 지치지도 않고 몇 시간씩 수다를 떨었다. 빙카는 [피아노 레슨]과 [델마와 루이스]에 열광했고, 나는 [얼어붙은 마음]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좋아했다. 레이밴 안경을 쓴 빙카는 빨대로 콜라를 빨아들이며 색깔이 들어간 안경 너머로 나에게 윙크를 보내곤 했다. 차츰 빙카의 이미지가 희미해지다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면서 나의 환상여행도 중단되었다. 빙카를 못 본 지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난 25년 동안 빙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유난히 뜨겁고 가슴 설레던 1992년 여름은 다시는 오지 않을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이제 혼자였고, 학창시절의 서글픈 기억들을 되뇌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들었다. 

--- p.30~31 

 



빙카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에 별들을 흩뿌려주는 동시에 깊은 불안감을 던져주었다. 빙카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내게 독약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내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빙카는 문과, 나는 이과 대학 입시 준비반이라 개학 이후 거의 만날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빙카가 의도적으로 나를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쪽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어 내가 애써 구상한 나들이 계획이 무산되기 일쑤였다. 빙카의 반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고등사범학교 입시 준비반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알렉시 클레망 선생님에게 매료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두 사람이 가벼운 데이트를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깊은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 p.79

 

 

 

빙카가 눈을 뜨더니 베개를 짚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는 돌리프란 두 알을 내밀었다. 
“몸이 불덩어리 같으니까 어서 이 약을 먹어.”
빙카는 고열 때문에 헛소리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빙카가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물범벅이 되었어도 빙카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매력,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빙카에게서만 볼 수 있는 매력, 어느 누구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70년대 포크송에 섞여 들려오던 첼레스타 소리처럼 맑고 청아했던 빙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하염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토마!” 
빙카가 힘없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난 정말 구제불능인가 봐.”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일인데 그래?”
빙카가 탁자 쪽으로 몸을 굽히더니 뭔가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펜인지 알았는데 나중에야 임신키트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 임신했어.” 

--- p.88~89

 

 

 

 

내가 잠시 폭력 행위를 멈춘 사이 알렉시가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장딴지를 잡아당겼다. 나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 위에 올라탔다. 먹잇감이 갑자기 포식자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알렉시가 양 무릎에 힘을 가해 나를 꼼짝 못하게 조였다. 그의 손에 깨진 유리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가 유리조각으로 나를 찌르려고 손을 치켜드는 모습을 보았지만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모든 걸 체념하려는 순간 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알렉시가 흘린 피로 내 얼굴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그가 내 몸 위에 쓰러졌고, 나는 겨우 한 쪽 팔을 빼내 눈두덩에 묻은 피를 닦았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한 가운데 막심의 실루엣이 보였다. 챌린저 상표 트레이닝 복, 회색과 빨간색 가죽이 어우러진 테디 점퍼는 막심이 늘 즐겨 입고 다니는 옷이었다. 

--- p.94

 


조사대상자들의 진술을 종합해본 결과 12월 20일 일요일부터 다음날인 12월 21일 월요일, 그러니까 빙카와 알렉시가 사라져버린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생텍쥐페리고교 경비원 파벨 파비안스키는 일요일 오전 8시에 알렉시가 운전하는 알핀 A310 자동차가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출입구를 막고 있던 차단기를 열어주었다고 진술했다. 파벨은 조수석에 타고 있던 빙카가 차창을 열고 인사를 한 사실도 기억해냈다. 일요일 오전 8시 10분 경 오사르투 로터리에서 눈을 치우던 시청 직원 두 사람이 알렉시의 차가 앙티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증언했다. 게다가 알렉시의 차가 발견된 장소도 앙티브 역 근처의 리베라시옹 대로변에 있는 코인 빨래방 앞이었다. 파리 행 열차 안에서 빨강머리 여자가 ‘뮌헨글라드바흐’라고 새겨진 모자를 쓴 남자와 동승한 걸 보았다고 증언한 승객들도 여러 명 나타났다. 뮌헨글라드바흐는 알렉시가 좋아하는 축구팀이었다. 파리 7구 생시몽 가에 위치한 [생트클로틸드 호텔]의 야간 당직자는 일요일 저녁에 빙카와 알렉시가 그 호텔에서 하룻밤 투숙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호텔의 야간 당직자는 전날 전화로 예약이 이루어졌고, 당일 프런트에서 숙박료를 결제했다고 증언했다. 

--- p.127~128



청소년 시절, 나에게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있었고, 내 상대가 『대장 몬느』나 『폭풍의 언덕』 같은 소설에서 방금 빠져나온 여주인공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대를 만나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길 열망했고, 빙카가 바로 내 이상적인 여성상에 부합한 최초의 여자아이였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빙카가 아니라 내가 머릿속에 그려보던 이미지를 덧씌워 이상형 여자아이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빙카를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그녀와 전혀 다른 인물일 수는 없었다. 
“담배를 깜빡 했네. 내 사물함에 가서 핸드백 좀 가져다줄래?”
파니의 목소리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로 이끌어냈다. 파니가 열쇠꾸러미를 데비 해리에게 던져주었다. 

--- p.157



불행은 겹쳐서 찾아온다더니 외조모는 남편이 동부전선에 가 있는 동안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외조모는 끝까지 상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 노동자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네사람들에게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인 셈이었다. 외조모가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낳은 아이가 바로 내 엄마 안나벨이었다. 엄마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동네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얄궂은 사연이 깃든 출생 탓에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아무런 잘못도 없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다. 혹독한 놀림을 꿋꿋하게 견뎌온 엄마는 웬만한 도발에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엄마는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어떤 일도 엄마를 당혹하게 만들 수 없고, 그 어떤 충격도 상처를 가할 수 없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엄마의 침착하고 강인한 면모는 나의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 p.170~171

 

 

 


아버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점퍼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냈다.
“내가 함정에 빠졌어.” 
아버지가 손가락 사이에 든 시가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 아이가 내 주변을 맴돌며 나를 유혹했어.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사기극인 줄도 모르고 덥석 걸려든 거야. 결국 10만 프랑을 주고 끝냈어!”
“어떻게 아버지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여학생과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죠?”
“그 아이는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자기결정권이 있는 나이였어. 이미 이놈 저놈 만나고 다닌 탓에 남자를 다루는 방법을 훤히 꿰고 있더군. 난 그 아이에게 아무런 강요도 한 적이 없어. 그 아이가 먼저 나를 유혹했고, 스스로 내 품으로 뛰어들었을 뿐이야!”
나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아버지를 가리켰다.
“빙카는 나와 가깝게 지낸 여자 친구였어요.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요?”
“빙카가 네 여자 친구였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남녀관계라는 게 원래 그래. 아들 친구라고 해서 연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잖아. 빙카는 제멋대로인데다 지나치게 영악해 네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아이였어. 나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 것만 봐도 그 아이가 얼마나 요물덩어리인지 알 수 있잖아.” 

--- p.181~182



내 엄마 안나벨은 남자들이 쉽게 작업을 걸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완강하게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엄마는 마치 다른 세상, 보통 사람들은 아예 접근조차 불가한 다른 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성장기에 접어든 나는 줄곧 엄마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엄마는 대개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생각이 복잡했고, 아버지 같은 남자와 생을 함께 하기에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마치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수억 개의 별이 빛나는 저 우주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는 듯했다. 

--- p.187~188

 

 

내 기억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까? 물론 내가 빙카를 본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다만 나는 빙카를 보았던 순간의 기억이 사라질까봐 두려워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투사해 깊이 아로새겼다. 빙카가 살아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기억이었으므로 나는 수없이 그 장면을 되뇌었다. 나도 그 기억이 근거가 허약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대한 인간의 기억은 픽션과 재구성이 가미되게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 기억은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환상적이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 과연 내가 워싱턴스퀘어에서 본 그 아이가 빙카가 확실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 아이가 빙카였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내 기억이 완벽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었다. 

--- p.209



운명은 수많은 악당들을 별일 없이 살아남게 내버려두는 반면 착하고 심약한 사람들을 골라 일찍 저 세상으로 데려가는 악질적인 변태가 분명했다. 
장크리스토프 선생님의 죽음은 한때 나를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치기 전 나에게 매우 감동적인 글을 남겼고, 뉴욕에 있던 나는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편지를 받게 되었다. 장크리스토프 선생님이 남긴 편지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남긴 편지에서 잔혹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패배자의 비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편지에서 고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을 만큼 지쳤다고 고백했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힘겨운 날들을 견디게 해주었던 독서조차 이제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책에 대한 환멸을 언급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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